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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승을 왜곡한 신자유주의자 마이클도일
    독서방 2016. 4. 19. 10:39



    행정학과 3학년 99****** 정명진


    “자유주의자의 원초를 제공한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최근 200년간 지속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의 평화를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비자유주의 국가들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강요는 정당한 것이다.”


    지난 1학기 국제관계론 수업에서 나는 이렇게 배웠다. 그래서 국제관계학에 대해 처음 공부를 시작한 나로서는 그러한 선입견에 의해서 칸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의 나는 현실에 나타난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허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자본주의의 허울을 쓰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란 인류평화의 기초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칸트의 저서를 직접 읽어보면서 내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칸트에게서 나의 세계관과 비슷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었으며 인류는 그러한 평화를 언젠가는 이룩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그러한 그에게서 그동안 희미하게 생각해온 진보적 역사철학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는 진보하지 않고 테두리 안에서 비참하게 반복되기만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인류 역사의 진보를 믿고 있는 나는 지금까지의 피로 얼룩진 전쟁의 역사를 설명하지 못해 매번 내 신념으로 설득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칸트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이기심에 기인해 인간들 사이의 갈등 자체가 인류를 궁극적인 평화로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비로소 칸트와 오해를 풀고 동지가 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신뢰를 쌓은 칸트를 마이클 도일이라는 현대 이론가가 스승을 왜곡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두 번 속지 않을 것이다.


    우선 마이클 도일이 쓴 논문 ‘자유주의와 세계정치’라는 논문은 그 글을 쓴 이유부터가 불순하다.(철학적 글쓰기로서의 불순함을 말하는 것이다.) 마이클 도일은 신현실주의자들과 맞서서 세계적인 논쟁을 펼치고 있었던 신자유주의자(혹은 자유주의자)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약점을 찾고 자유주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스스로 스승으로 삼았던 칸트의 주장이 200년이 지난 지금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검증하고자 했다.


    왜곡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칸트는 현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구평화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이클 도일이 펼친 왜곡의 논지를 하나씩 짚어 나가 보자.


    먼저 그는 그의 논지를 펼치기 전에 자유주의 국가들 간의 평화와 비자유주의국가에 대한 자유주의 국가의 폭력성이라는 모순된 점을 현실주의자나 맑시스트들은 설명해 내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에 이를 칸트를 통해서 설명해 내고자 한다. 먼저 자유주의 국가들 간의 200년간의 평화를 설명하기 위해 칸트의 세 가지 확정조항인 공화정체와 공화정체의 연방, 마지막으로 세계시민법의 세계적 환대를 근거로 든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고 있는 자유주의국가들에 의해 칸트가 예견한 것처럼 그들 간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과연 칸트가 말한 공화정과 공화적 국가들의 연방개념이 도일이 제시하고 있는 현실자유주의국가와 동일시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분명 철학적 개념과 현실개념이 수준에 있어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 차이는 질적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외형적으로는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본질은 다르다고 본다. 현실국가에서 자유주의 국가와 비자유주의 국가의 구분은 그 형태적 차이보다는 자본주의국가의 여부에 의한 구분인 것이다. 당연히 자본주의국가들 사이에서는 세상에 비자본주의국가가 있는 한 그들끼리 동맹을 맺고 비자본주의국가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정책을 펴면서 그들만의 평화를 향유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세상에 비자본주의 국가가 사라지고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국가, 즉 자본주의 국가들로만 가득 차게 되는 시대가 온다면 과연 인류의 평화가 실현가능 할까?


    다음으로 자유주의국가들의 비자유주의국가에 대한 폭력성을 도일이 칸트를 통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는 칸트 역시 “각 나라는 그 이웃국가에게 자유국가의 평화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비자유정부는 그 국민들에 대해 침략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며 결국 같은 자유국가들은 우호적이라고 추정되는 반면 비자유국가들은 적대적이라고 추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 추정은 또한 스스로를 합리화시켜 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며 자유주의 국가의 비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폭력의 역사를 정당화 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국가가 폭력을 통해서 반자유주의국가에 대해 자유주의연방으로의 가입을 강요하는 것이 평화실현이라는 이유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칸트가 그렇게 하라고 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칸트는 영구 평화를 위한 예비조항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외국의 간섭은 내부 시련에 맞서 싸우는 독립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 자체가 공격이며 또한 모든 국가의 자율성을 위협하는 일이 될 것이라며 내정간섭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자 마이클도일이 그들 스스로 스승으로 삼고 있는 칸트를 왜곡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칸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러한 글을 써야 하는 궁색한 처지 때문에 그러한 불륜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던 자유주의의 자리를 현실주의에게 빼앗기고 굳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현실주의자들보다 지금까지의 현실을 보다 더 잘 설명해야 해야만 하는 딱한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어쭙잖지만 내가 충고 한마디 하려고 한다.


    “언제부터 자유주의이념이 현실을 설명하는 이론이었나? 그것은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현실주의자들의 해왔던 거 아니었나? 제발 자유주의의 진모습으로 돌아와라. 진보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믿고 희망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자유주의의 참모습으로 돌아와라.”


    * 이글은 2004년 12월 정치학과 수업 리포트로 제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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