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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 장마 속, 지리산을 가다
    떠나기 2016. 4. 19. 11:05

    2010. 7. 17  새벽 4시 반 구례버스터미널


     

    3년 전 임신한 아내와 함께 앉아서 차를 기다렸던 평상에서 이 글을 쓴다. 그리움과 설레임이 교차한다. 오랜만에 여행이다. 그동안 왜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까. 내 일상이 너무 무거워져 버렸다. 나는 무거워진 일상을 비우기 위해 이렇게 떠나왔다.


    여름 장마 속 지리산. 지리산도 일상에 찌든 나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다. 우두두둑. 굵은 장맛비가 지리산으로 향하는 여행길을 가로 막는다. '그래 쉽지는 않겠지.' 쏟아지는 빗물로 일상의 찌든 때를 씻고 지리산에 오르겠다. 힘들게 오를 수록 지리산은 나에게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장마전선이 북상하는 동안 나는 기차를 타고 남하했다. 하지만 이곳도 여전히 장마권 속이다. 기차 창밖 너머로 비가 멎는 듯 했으나 또다시 세차게 퍼붓고 있다. 


    돌아보면, 이십대 후반 그리고 서른살인 지금은 내 인생의 장마였던 것 같다. 앞도 보이지 않고, 밖으로 나가기도 두려웠다. 잠시 참고 지내면 끝날 것 같던 장맛비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때문에 더 연장됐다. 한동안 나는 장마권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장마전선이 이동하는 방향을 거슬러 가보지도 못했다. 게으름 그리고 두려움 때문이리라. 


    그래서 장맛비가 퍼붓고 호우특보가 내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지 않으면 안됐었다.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장마의 끝자락이길 빌 수 밖에. 몸을 더 가벼이, 깨끗이 해서 지리산을 올라야겠다.




    7.17 오전 7시. 성삼재


    지리산은 나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새벽 끝 무렵 비가 멎는 듯하더니, 버스를 타고 오른 성삼재는 뿌연 구름 속에서 여전히 제법 굵은 비를 뿌리고 있다. 아직 나를 깨끗이 비우지 못했나 보다. 


    성삼재에 도착하자마자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버스에 올라 타 입산이 통제됐으니 타고 온 버스를 타고 내려가든지, 여기서 기다리던지 선택하란다. 오늘 내로 산에 오를 수 없으니 그냥 내려가는 게 좋을 거라는 투다. 

    타고 온 버스 비가 아까워 성삼재 휴게소에 내려서 기다리고 있으니, 등산객들이 하나 둘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른다. 올라가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노고단 산장까지는 상관없을 거란다. 


    자갈밭으로 포장된 산길을 오른 지 15분 쯤 됐을까. 얼마 전 버스에 올라탔던 무뚝뚝한 관리 공단 직원이 자를 몰고 와 험상궂은 표정으로 얼른 내려가라고 윽박지른다. 우리는 못 이긴 채 그러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단 직원은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을 찾기 위해 차를 몰고 자갈길을 올라갔다.


    하지만 올라 온 길이 너무 아쉬웠다. 이대로 내려가면 지리산 산행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떠난 여행을 이런 식으로 끝내기는 싫었다. 이리 저리 머리를 굴리며 걷다 보니 작은 개울을 따라 샛길이 보였다. 우리는 샛길로 들어가 나무 너머로 숨었다.


    우거진 숲 속에 매복해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우리는 한국 전쟁 때 빨치산이라도 된 양 숨을 죽이고 공단 직원이 차를 몰고 내려가기만을 기다렸다. 10여분 뒤에 공단 직원이 탄 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자갈길을 내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작전이 성공했다는 듯 서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샛길을 빠져나왔다. 


    다시 공단 직원에게 잡힐 새라 1시간 거리를 40분 만에 걸어 노고단에 도착했다. 노고단도 역시 구름에 갇힌 채 고요했다. 인적도 드물었다. 노고단에서 지리산 능선으로 향하는 길만 입산통제 입간판이 묵직하게 막아서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산행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 노고단 산장에 여장을 풀고 입산 통제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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