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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골다락방 이야기> 텃밭에서 몸을 씻다
    시골이야기 2015. 11. 13. 11:47


    이슬 맺힌 텃밭을 맨다. 풀을 움켜쥔 장갑은 이미 흠뻑 젖었다. 산기슭은 아직 새벽안개로 자욱하다.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의 끝자락을 알린다. 낫날에 쓰러지는 풀들의 사각거림이 손끝에 전해온다. 낫이 지나간 자리에 강아지풀들이 꼬리를 내리고 눕는다.


    장마가 지난 뒤 땅콩 밭이 풀에 덮여 버렸다. 잡초에 강하기로 유명한 땅콩이라지만 게으른 농부를 만난 탓에 잡초들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풀이 너무 무성해 일단 낫으로 풀을 벤 다음 호미로 뿌리를 뽑는다. 땅콩 두둑 위에 자란 풀은 내버려두고 두둑 사이 고랑만 맨다. 한 고랑을 다 매고 땀을 훔치며 뒤돌아본다. 풀숲에 갇혀 있던 땅콩 밭에 숨통이 트였다. 출근을 앞두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거리도 낫질 몇 번으로 사라졌다. 산기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밭고랑을 지나 움츠린 내 등 위에 올라탄다. 온 몸이 홀가분하다.


    5년 전 서른이 되는 나이에 가족과 함께 농촌으로 이사를 왔다. 그 후 텃밭을 매는 일은 아침 일상이 되었다. 유일한 사색의 시간이다. 풀을 정리하는 동안 복잡한 생각도 정리한다. 복잡한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낫질에만 집중하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는다. 일종의 낫질 명상이다. 그래서 고민거리가 생기면 텃밭으로 향하는 일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집 마당 앞에 딸린 텃밭이다. 반마지기 정도 되는 땅이 조용한 벗이 되어줄 줄은 서울에서 살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퇴근 후에도 텃밭에 들른다. 지친 몸이라 낫이나 호미는 들지 않는다. 불쑥 자라 있는 풀만 손으로 뽑는다. 그것도 귀찮으면 지난 새벽에 풀을 맨 고랑 한 끝에 서서 뿌듯한 마음으로 텃밭을 감상하거나, 자세를 낮춰 얼마 전에 뿌린 당근 씨앗에서 싹이 올라왔는지 살핀다. 운 좋게 매끈한 가지라도 열렸으면 저녁 반찬으로 아내에게 선물한다.



    한 시인이 저문 강에 삽을 씻었듯이 노을이 깔린 텃밭 위에서 머릿속의 찌든 때를 씻는다. 산업화 시대에는 온 몸으로 삽질을 했다면, 요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로만 삽질을 한다. 스트레스에 찌든 삽을 매일 씻지 않으면 녹슬기 마련이다. 산업화 시대의 삽처럼, 머리는 현대인들의 소중한 밥줄이다. 가족의 삶을 짊어진 내 몸뚱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머릿속 구석구석 찌든 스트레스를 매일 저녁 닦아낸다. 짙은 기름때 같은 스트레스는 독한 알코올로도 좀처럼 씻기지 않는다. 그래서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 과음을 한 다음 날, 새벽 텃밭에서 해장을 한다. 풀을 매다 보면 등을 적신 땀과 함께 술기운도 날아가고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뭐하는 겨? 제초제라도 뿌리든지, 비닐로 덮든지 혀. 저걸 언제 손으로 다 매고 있댜?”

    새벽예배 가던 동네 할머니가 몇 마디 건넨다. 평생을 논밭에서 살아온 농사꾼의 눈에는 ‘풀 반, 작물 반’인 꼬락서니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한번은 마을 이장님이 쓰다 남은 비닐을 주겠다며 제발 밭에 풀 좀 잡으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며 제초제 치고 비닐로 덮는 것이 더 힘들다고 얼버무린다.


    농사일이 생계인 농민들에게는 작물을 얼마나 거두어들이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수확량은 뒷전이다. 사실 지난 봄 풀숲 속에서 캐낸 감자는 몇 개 되지도 않는 데다가, 어린이집을 다니는 둘째 아이 주먹만큼 작았다. 하지만 아내는 우리 밭 감자가 작아도 맛이 알차고 깊다고 했다. 농약은 물론 거름도 주지 않고 풀과 함께 자연 그대로 키워낸 맛이다. 거두어들이는 양은 적어도 우리 네 식구 먹을거리로는 충분하다. 그래서 작물이 죽지 않을 정도만 풀을 맨다. 농작물이 먹어야 할 땅 속 영양분을 풀이 조금씩 나눠 먹더라도, 풀과 경쟁하면서 자란 농작물이 더 건강하다고 믿는다. 건강한 먹거리도 중요하지만 풀을 매는 행위는 나의 신성한 노동이자 놀이이다. 손으로 풀을 매면 운동도 되고 정신건강에도 좋은데 제초제를 뿌리고 비닐을 씌울 이유가 나에게는 없다.


    답답한 마음에 직장 동료들과 술자리를 한 날이었다. 밤늦게 집으로 도착하자마자 텃밭 앞에 퍼질러 앉았다. 가을 초입의 텃밭은 풀벌레 소리로 가득했다. 수십 종의 풀벌레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울어댄다. 풀벌레 소리가 이렇게 다양한지 그제야 알았다. 한 낮에는 큰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 소리에 묻힌 작은 소리들이다. 모두 잠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목청껏 울어댄다. ‘나 여기 살아 있소. 귀뚜르르르.’ 시에다 곡을 붙인 어느 노래의 한 구절처럼.


    몸을 일으켜 텃밭 깊숙이 들어가 본다. 어둠 속에서 풀벌레 소리만 반짝거린다. 풀벌레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날개를 떨며 연주를 한다. 왼쪽에서 소리가 줄어들면 오른쪽에서 또 다른 소리가 커진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에서 또 다른 악기의 연주가 시작된다. 자연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입체적인 울림이 온몸을 감싼다.


    술기운에 텃밭 한가운데 앉아 풀에게 말을 건다. ‘내가 그렇게 베어내고 뽑아냈는데도 너는 저 많은 생명을 다 품고 있었구나. 그저 생명력 강한 잡초인 줄만 알았는데 품도 참 넓구나.’ 풀 앞에서 옹졸한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풀벌레 소리가 가슴을 토닥였다. 지난 새벽 마구 잡이로 풀을 맨 미안한 마음에 텃밭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 귀를 기울이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가족이 먹을 작물을 위해서 풀을 매지만 앞으로는 적어도 풀씨는 남겨두어야겠다. 이런 모습을 보면 동네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겠다며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풀씨는 내년에도 풀벌레들에게 공연장을 열어 줘야하고, 나에게도 낫질명상을 할 수 있게 무성하게 자라야 한다.


    어느새 텃밭 위로 잠자리가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가을이다. 자주색으로 변해가는 고구마 잎 위로 솟아 있는 강아지풀 이삭들이 한들한들 흔들린다. 이제 풀이 제 아무리 자라도 고구마나 땅콩을 덮지는 못한다. 공존의 계절이다. 하지만 텃밭을 바라보고 있으면 낫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질간질한다. 찌르르르. 쪼르르르. 풀벌레가 울어대는데 감히 낫이나 호미를 대지 못한다. 가을 텃밭은 낫질이 어울리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로 가슴 속이 가득 찰 때까지 그냥 텃밭에 앉아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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