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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생물학으로 읽은 인문학 '인간은 무엇인가'
    책메모 2019. 4. 14. 15:17
    생물학 이야기 - 10점
    김웅진 지음/행성B이오스
     

    객관적 자기통찰은 우리를 진화의 감옥인 '자아'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나는 인문계 출신이다. 호기심이 많았던 사춘기 시절 잠깐 지구과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수학에 한계를 느껴 인문계를 택했다. 대부분 학생들이 그렇지 않을까. 인문계열 공부가 딱히 재밌거나 소질이 있어서라기보다 단지 수학이 싫어서 자연계를 포기하는 현상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수학 수준을 조금만 낮췄더라면 우리나라 자연과학이 수준이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문계를 선택한 이후,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뒤적였다. 대학교 시절부터 자연과학과 담을 쌓고 살았다. 내가 살아갈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자연과학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나와 전혀 상관없을 줄 알았던 자연과학이 요즘 내 인생을 파고들고 있다. 내 인생뿐만 아니다. 학문 영역에서도 자연과학인 생물학이 다윈의 진화론을 통로 삼아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범주를 넘나든다.

     

    "나는 자연의 평범한 사건일 뿐이다"

     

     

    김웅진의 <생물학 이야기>도 그런 책이다. 생물학은 지구의 탄생부터 식물과 동물을 거쳐 인간까지 탐구 대상을 넓힌다.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문학의 핵심 화두의 답을 찾는데 생물학이 기꺼이 도구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인간중심적 사고 때문에 인간이 아주 특별한 존재인양 스스로를 치켜세워 왔지만,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존재와 생물과 인간과 '나'는 모두 연속선상에 있는 평범한 사건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나라는 존재가 수많은 '평범한 사건'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니. 이런 깨달음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도교의 '물아일체', 불교의 '해탈'에 이르는 경지다. 도교와 불교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수십 년간 속세를 떠나 수양을 해야 이를 수 있는 경지를, 책 한 권의 생물학적 지식으로 다다를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물론 깨달음을 체화해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또 다른 수양이 필요하다.

     

    깨달음의 경로를 요약하면 이렇다. 생물과 무생물 모두 원자나 분자 등 물질로 이뤄져 있다.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의 결합으로 이뤄진 독특한 물리 현상이 생명이다. 생명을 가진 동물은 물론 인간도 물질로 이뤄져 있다. 생명은 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 즉, DNA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진화의 결과물이다. 인간의 의식, 행동도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하면서 사회적 동물이 된 인간은 자기정체성을 부여했다. 사회적 관계와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를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자기를 인식하는 능력이 자의식이다. 자의식은 자기애와 자기집착을 낳는다. 사실 자기애와 집착은 DNA가 만든 신기루다. 자기애와 삶에 대한 집착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몸을 아끼며 생존에 전력투구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언젠가 죽어 사라지고 DNA는 존속된다. (자신의 복제된 DNA를 가지고 있는) 아들, 딸의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것도 DNA의 속임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자기집착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을 객체화해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과학, 특히 생물학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자기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의식은 비로소 자신과 사물을 객관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스스로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나'라는 인간은 다른 인간들이나 생물들, 나아가서 무생물과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존재(일시적인 자연현상)임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객관적 자기통찰은 우리를 진화의 감옥인 '자아'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생명의 열쇠를 쥔 다윈의 진화론

     

    이러한 깨달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알아야 한다. 지구의 역사라는 억겁의 시간 동안 수많은 DNA가 복제됐다. 복제 과정에 희박한 확률로 변이를 일으킨다.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됐지만 40여억 년 동안 수많은 변이가 일어났다. 자연의 제한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면서 장기적으로 환경에 적응한 변이는 번식을 통해 살아남고, 그러지 못한 종은 사라진다. 이것을 '자연선택'이라고 부른다. 생물은 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여러 종으로 진화했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과 식물은 영속하는 DNA의 운반체에 불과하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이 어떻게 증명되고 명백한 진리로 자리 잡았는지를 지구의 탄생부터 뇌과학이 갓 발전하기 시작한 현재까지의 역사를 통해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우주와 태양계, 지구의 탄생부터 최초생물이 발현되기까지를 요약한 내용은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는 '긴 서술이 부담스러우면 징검다리처럼 건너뛰어도 된다'고 했지만 검증된 최신 이론의 엑기스만 뽑아서 과학자가 옛날이야기 하듯 단 8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해 설명한 글을 읽는 수 있는 것 자체가 행운 같았다.

     

    저자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최초복제물질의 탄생과 세포의 형성, 다세포생물이 다양하게 진화하는 원리를 설명한다.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을 증명하는 실험과 연구를 소개하고,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결국 뇌과학과 사회생물학에 이르러 인간의 의식과 행동, 문화라는 인문학과 만난다.

     

    국제적 과학자가 우리글로 풀어낸 자연과학

     

    요즘 인문학 서적을 읽다 보면 다윈의 진화론과 뇌과학 등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인용된다. 이미 진화론은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뿐만 아니라 경영학 등 실용학문에서도 활용된다.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조직 내에서 협력하는 지도 진화론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경영이론을 실제로 적용하는 기업들도 생기고 있다. 진화론이 선사하는 통찰은 의외로 넓고 깊다.

     

    여러 서적에 단편적인 사실만 소개된 생물학 지식에 목마르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전문 번역 서적을 읽자니 버거웠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한글로 쓴 제대로 된 자연과학 서적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자연과학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한국인 학자도 드물고, 더불어 대중서적을 쓸 만큼 글 솜씨까지 겸비한 분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쓴 김웅진 박사 같은 사람은 귀하다. '생물학이야기'라는 소박한 제목을 붙였지만 저자는 서울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분자생물학, 생물정보학을 연구하면서 지놈지도 작성에 필요한 핵심기술개발에 참여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학자이다. 칼텍지놈연구소 소장 및 미국 지놈프로젝트 책임연구원으로 인간염색체 시퀀싱을 담당했다고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외국서적을 번역한 글을 읽을 때의 묘한 불편함 없이, 국제적인 학자가 우리글로 쓴 자연과학 대중서적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흔하지 않은 행운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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